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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로열메일 AI 광고, 고인 목소리 재현 논란
위키트리
영국 우체국 로열메일(Royal Mail)이 2025년 크리스마스 광고의 내레이션을 AI로 만들었다고 인정했다. 광고 말미의 따뜻한 남성 목소리가 사람이 아니라 AI가 생성한 음성이었다는 것이다. 방영 당시에는 이를 알리지 않았다. 2014년 숨진 BBC 내레이터 폴 본(Paul Vaughan)의 딸이 그 목소리에서 아버지를 알아본 것이 계기였다.
사건은 2025년 11월 영국 버킹엄셔의 한 가정에서 시작됐다. 루시 윈(Lucy Wynne)은 저녁에 거실에서 TV를 켜 둔 채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ITV에서 로열메일 광고가 나왔고 마지막 문구 “Royal Mail, it’s so much more than just a card”가 흘러나왔다. 윈은 남편 대런에게 “아빠 목소리”라고 말했다. 남편은 “바보 같은 소리 말라”고 답했다. 윈은 확신했다고 한다.
폴 본은 2014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윈은 아버지가 로열메일과 일한 적이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 허락 없이 아버지의 목소리를 재현했을까 걱정했다. 윈은 사연을 미국 매체 데드라인(Deadline)에 제보했다. 데드라인은 로열메일과 광고 제작사, AI 기업들에 질의한 뒤 이를 보도했다.
로열메일은 데드라인에 내레이션이 AI로 만들어졌다고 시인했다. 대변인은 이런 방식이 “점점 흔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에는 광고가 외부 파트너사들이 제작했고 실제 배우들이 출연했다고 설명했다. 내레이션은 프롬프트(AI에 입력하는 지시문)로 생성됐고 특정인을 복제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제작 파트너들이 점검을 했으나 닮은 목소리 우려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본은 영국 시청자와 청취자에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1968년부터 1995년까지 BBC 과학 프로그램 ‘호라이즌(Horizon)’의 주 내레이터였다. BBC 라디오4 예술 프로그램 ‘칼레이도스코프’는 1973년 첫 방송부터 1998년 마지막 방송까지 진행했다. 1984년 핵전쟁 드라마 ‘스레즈’도 그의 내레이션이었다.
광고 시장에서도 활약했다. 통신사 오렌지가 영국에 출범했을 때 “The future’s bright, the future’s Orange”라는 문구를 그의 목소리로 오랫동안 내보냈다. 테스코와 콜게이트 광고에도 목소리를 냈고 ‘패딩턴’ 오디오북도 녹음했다. 패딩턴 오디오북은 출판사 하퍼콜린스를 통해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카세트테이프와 CD로 나왔다.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부고 기사는 “신이 말할 때는 폴 본의 목소리를 쓴다”고 표현했다.
데드라인은 방송·광고·오디오북에 걸친 방대한 자료가 공개돼 있어 본의 목소리가 AI 모델 학습에 “딱 맞는” 재료라고 짚었다. 따뜻하고 권위 있으며 “누가 들어도 영국적인” 목소리라는 설명이다. 크리스마스 광고가 신뢰감을 주려고 찾을 만한 음색이라는 것이다.
데드라인에 따르면 캠페인은 광고대행사 다윈 앤 더 머신스가 총괄했다. 독립 제작사 언톨드 스튜디오스는 영국 현지에서 실제 배우들이 등장하는 짧은 이야기를 촬영했다. 내레이션은 체코에 있는 AI 전문 기업 Fameplay에 하청됐다. Fameplay는 Czech Media Invest의 투자를 받는다. 이 회사의 회장이 Daniel Křetínský이고 그가 이끄는 EP Group은 로열메일의 소유주이기도 하다.
광고 제작에 참여한 영국 측 관계자 한 명은 Fameplay의 Juraj Felix가 촬영 현장에 있었다고 데드라인에 말했다. 데드라인은 Felix를 Křetínský의 측근으로 소개했다. 이 관계자는 “그는 AI 내레이션에 집착했다”고 전했다. 제작팀은 역사 깊은 영국 브랜드에 AI를 쓰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사업 기회를 봤다”고 했다.
데드라인은 Fameplay가 일레븐랩스의 기술을 라이선스받아 썼다고 밝혔다. 데드라인이 220억 달러(약 29조 5,000억 원, 1달러 1,342원 기준) 규모라고 소개한 AI 음성 기업이다. Fameplay는 프롬프트에 본을 참조한 내용이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일레븐랩스는 광고 음성이 본 목소리를 직접 복제한 것이 아니라는 점만 확인했다. 본이 녹음한 자료로 모델이 학습됐는지, 그래서 일반적인 프롬프트로도 그와 비슷한 소리가 나올 수 있는지는 답하지 않았다.
음성심리학자 나딘 라반 퀸메리 런던대 박사는 가족이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매우 잘 알아본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 그는 “윈이 광고 속 목소리를 폴이라고 인식한 것으로 보아 매우 유사한 목소리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요크대의 법음성학 교수 빈센트 휴스는 광고와 본의 실제 녹음을 비교했다. 광고 속 음성이 짧아 분석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자음과 모음의 발음 방식, 그리고 음색에서 “상당한 음성적 유사성”을 발견했다. 데드라인은 오픈소스 AI 분석 도구 3종에도 두 음성을 넣었다. 세 도구 모두 “동일 화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윈은 소리의 닮음보다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다는 점에 분노했다. 그는 “터무니없다”면서 “그들은 이 목소리가 누구 것인지 알아보는 기본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2주 전에 돌아가셨을 수도 있고 10년 동안 요양원에서 말하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었을 수도 있는데 갑자기 TV에 나온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AI 때문에 성우들이 일을 잃는 것을 싫어했을 것이라며 “돈을 내고 사람을 불러서 일을 맡기라”고 로열메일에 요구했다.
윈은 아직 사과를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로열메일은 “제기된 우려를 이해하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답했다. 일레븐랩스는 이후 본을 자사의 ‘노 고 보이시스’ 목록에 올렸다. 앞으로 이 플랫폼에서 그의 목소리를 직접 복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논란은 배우 니콜라 코글란, 루크 에번스, 휴 보닌빌 등이 AI로부터 배우와 성우를 보호할 법적 장치를 요구하는 캠페인 ‘세이브 아워 보이시스 나우’를 시작한 지 한 달 뒤에 터졌다. 이 캠페인을 만든 배우 Peter Caulfield는 AI를 이렇게 쓰면 의도했든 아니든 철저한 점검 없이는 “무덤 속 목소리를 훔치는 일이 될 수 있고 유족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