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읽음
혐오표현 불법화에도 심의 난항, 방미심위 기준 적용 고심
미디어오늘
0
허위조작정보 근절법이라 불리는 정보통신망법(이하 망법) 개정으로 온라인상의 혐오표현이 불법정보가 됐다. 그러나 정작 이를 적용해 방송미디어통신심의위원회(방미심위)가 혐오표현 심의를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기존에도 방미심위 차원에서 차별·비하 정보를 심의하고 있던 터라 이를 개정 망법과 어떻게 조화시킬지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미디어오늘이 방미심위 통신심의소위원회(통신소위) 회의록을 전수조사한 결과 지난달 7일 개정 망법 시행 이후 개정 내용이 적용된 방미심위 심의 사례는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망법에 근거해 온라인 콘텐츠를 심의하는 방미심위 특성상 개정 망법으로 심의가 어떻게 달라질지 관심이 쏠렸는데 실제로는 유의미한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방미심위는 개정 망법이 새롭게 정의한 ‘허위조작정보’는 심의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밝힌 바 있다. 반면 개정 망법이 불법정보에 포함시킨 혐오·차별표현은 방미심위 통신심의 대상이다. 개정 망법은 인종, 국가, 지역, 성별, 장애, 연령, 사회적 신분, 소득수준 또는 재산상태를 이유로 폭력이나 차별을 선동하는 정보, 증오심을 심각하게 조장하는 정보 등을 불법정보로 규정했다.

문제는 방미심위가 이미 심의규정에 따라 차별·비하 정보를 대상으로 유해정보 심의를 해왔다는 사실이다. 정보통신 심의규정 8조 3항에 따르면 장애인, 노약자 등 사회적인 소외계층을 비하하는 내용, 합리적 이유 없이 성별, 종교, 장애,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 인종, 지역, 직업 등을 차별하거나 이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는 내용을 방미심위가 심의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미디어오늘이 입수한 최근 3년간 차별·비하 시정요구 현황에 따르면, 방미심위는 △2023년 1644건 △2024년 852건 △2025년 567건의 차별·비하 정보를 차단·삭제했다. 세월호, 이태원 참사 등 사회적 재난 피해자에 대한 조롱과 여성 혐오, 전라도 비하 등의 차별표현이 해당됐다. 2023년 차별·비하 심의 사례가 많았던 건 이태원 참사 피해자 및 유가족에 대한 비하글이 많았기 때문이다. 2025년엔 위원 추천 지연에 따른 운영 공백기가 있었다.

차별·혐오표현, 유해정보인가 불법정보인가

특정 커뮤니티에 특정 인종을 대상으로 한 인종차별 게시물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원래였다면 정보통신 심의규정에 근거해 차단·삭제하면 된다. 그러나 개정 망법에 따라 심각한 인종차별 게시물은 ‘불법’이 됐다. 정보통신 심의규정에 근거하면 ‘유해정보 심의’, 개정 망법에 근거하면 ‘불법정보 심의’가 되는 셈이다. 방미심위 입장에선 특정 게시물에 불법 낙인을 찍는 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존의 ‘차별·비하 정보’에 개정 망법을 적용하면 유해정보를 심의할 때보다 판단 기준이 좁아질 우려가 있다. 혐오표현을 더 잘 규제하자고 만든 법이 혐오표현 심의를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방미심위가 불법정보로 심의하지 않으면 혐오표현이 아닌 게 되냐는 반발이 나올 수도 있다.

실제 심의 현장에서 이러한 고민이 드러난다. 지난달 9일 통신소위에서 김민정 부위원장은 “이번 망법에서 ‘불법정보’로 규정한 혐오표현은 상당히 좁게 규정돼 있다”며 “장애인, 노인에 대한 비하 표현까지 우리 심의규정에서 ‘유해정보’로 보고 있는데 그건 상당히 넓은 범위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부위원장은 이어 “(망법상 불법정보 기준인) 증오심을 심각하게 조장해 인간의 존엄성을 현저히 훼손하는 건 매우 엄격하게 봐야 하는 범위”라며 “그런 규정상의 차이에 대해서 위원님들과 사무처에서 당연히 계속 생각을 하고 계시겠지만 향후 심의를 하면서 우리가 계속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망법상 혐오표현엔 ‘모법’(근거가 되는 상위 법률)이 없다. 방미심위가 불법정보로 심의하는 도박 조장, 성매매 알선 등의 온라인 정보는 모법에서 불법행위들을 열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근거해 불법성 여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혐오표현을 불법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건 망법뿐이다. 망법이 혐오표현에 대한 처벌 규정을 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판례를 방미심위가 참고할 수도 없다.

김 부위원장은 지난달 9일 회의에서 “초상권 침해나 명예훼손은 판례 등 참고할 만한 기준이 있는데 이번 망법에서 온라인상에서만 불법정보로 규정되는 ‘헤이트스피치’(차별·혐오발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런 외부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 위원회가 첫발을 내딛어야 하는 것”이라며 “그걸 괜히 폭넓게 했다가는 나중에 소송이 걸려서 문제가 될 수도 있고, 또 너무 좁게 해석했다가는 실효성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차별금지법, 먼저 만들어졌다면 어땠을까

무엇이 혐오표현에 해당하는지 사회적 합의를 거쳐 차별금지법 등 모법에 기준을 먼저 만들고, 이에 근거해 심의를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김동찬 언론개혁시민연대 정책위원장은 통화에서 “다른 법률에서 불법으로 정하고 있는 것들을 온라인에서 규제하기 위해 망법상 불법정보가 있는 건데 (혐오표현은) 그런 법체계를 갖추지 못했다”며 “어떤 걸 불법정보로 규제할 건지 충분히 논의를 했어야 했는데 그런 과정이 부실했다. 그 한계가 이런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개정 망법이 시행된 이상 이를 어떻게 적용해갈 것인지 방미심위 차원에서 후속조치를 내야 한다. 방미심위는 미디어오늘에 “개정 망법의 입법 취지를 고려해 개별 안건 심의 과정을 통해 구체적인 적용범위와 기준을 정립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방미심위는 5·18민주화운동 관련 허위정보를 처벌하는 내용의 5·18특별법 제정 이후 ‘북한군 개입설’ 등 심각한 허위·왜곡정보는 불법정보로, 차별·비하 정보는 유해정보로 분류해 심의하고 있다. 이처럼 심의 사례가 쌓이면 방미심위 차원에서 기준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오지만 허위정보와 차별·비하 정보를 구분하는 것과 달리 혐오의 강도만을 놓고 불법정보와 유해정보로 분류하는 작업은 매우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5·18특별법과 달리 혐오표현 심의는 참고할 수 있는 판례도 없다.
16개 언론·인권 단체 등이 결성한 ‘혐오와 검열에 맞서는 표현의 자유 네트워크’(21조넷)는 지난달 방미심위에 혐오표현 심의 관련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들 단체는 방미심위가 인권·법률·사회학·미디어 전문가가 참여하는 전문 심의체계 또는 자문기구를 마련해 혐오표현 심의에 대한 전문성과 투명성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동찬 위원장은 “방미심위 혼자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며 “혐오표현 기준을 논의해온 국가인권위원회와도 소통할 수 있다. 전문적인 거버넌스를 구성해 혐오표현 심의 기준과 사례를 계속 공표하고 논의하는 과정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0 / 300